우리는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말을 마치 자연이 신비하게 모습을 바꾸는 행위를 설명하듯 사용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비는 전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어휘의 가련한 부족함에 있습니다.
현대 양자 이론은 내부적으로 일관됩니다. 수학은 더듬지 않습니다. 긴장은 미시적 실재를 애초에 그것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파동’이나 ‘입자’라는 거시적 범주에 억지로 넣을 때만 생깁니다. 이것들은 물결과 모래알의 세계에서 만든 서투른 도구이며 역사적 유물입니다. 전자가 파동인지 입자인지 묻는 것은 교향곡이 초록색인지 신맛인지 묻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 자체가 범주 오류입니다.
엄중한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도 정확히 같은 일을 합니다. 아버지 됨, 왕권, 분노, 사랑이라는 작고 거시적인 인간 경험을 값싼 천처럼 무한하신 분 위로 늘입니다. 창조주를 ‘그분’이라 부르거나 그분의 ‘뜻’을 인간 심리의 용어로 묘사하면 무언가 붙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한 직관의 ‘고전적 범주’에 갇힌, 우리 형상대로 만든 신적 우상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단 하나의 광자도 모순 없이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양자장 자체를 붙드시는 분을 우리의 은유로 감쌀 수 있다고 어찌 감히 생각합니까?
보어의 상보성은 하나의 ‘인간 크기’ 설명만 고집할수록 실제 진실을 더 많이 잃는다고 가르칩니다. 더 정확한 양자장론의 언어에서 우리가 ‘입자’라 부르는 것은 장의 양자화된 들뜸일 뿐입니다. 일상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더 깊고 단일한 실재의 물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더 큰 판본’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에 앉아 있는 고전적 물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담론의 빈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한한 마음에 무한하신 분을 ‘개념적으로 만족스럽게’ 만들려는 시도를 멈춰야 합니다.
이중성은 자연의 역설이 아니라 우리 한계의 표지입니다. 예배는 비유가 실패하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말을 멈추고 실재가 ‘파동’도 ‘입자’도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가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의미의 ‘왕’이나 ‘재판관’도 아니심을 깨달을 때 시작합니다. 그분은 그저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우리는 작고 인간 모양인 상자에 들어갈 수 없는 실재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입니다.


